이성계 위화도 회군 4불가론 그리고 요동정벌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정리해 봅니다.
요동정벌의 배경과 흐름
14세기 후반 고려는 원나라가 무너지고 새로 등장한 명나라와 관계를 다시 정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명이 철령 이북 땅을 자신의 옛 영토라 주장하며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최영을 중심으로 “요동은 본래 우리의 영토였으니 되찾자”는 북벌론이 힘을 얻었고, 우왕은 전국에서 5만여 명의 군사를 모아 최영을 팔도 도통사,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로 임명해 요동정벌군을 편성하였습니다.
이성계 4불가론(요동정벌 반대 논리)
1) 4불가론의 네 가지 내용
이성계는 요동정벌 명령을 받은 뒤 여러 차례 출병 취소를 건의하면서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이 전쟁은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를 4불가론 또는 4대 불가론이라 부릅니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못하니 명나라와의 정면 충돌은 위험하다는 점,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일으키면 농번기를 망치고 군사들도 더위와 피로로 사기가 떨어진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셋째, 북쪽으로 대군이 모두 나가면 남쪽 바다를 지키기 어려워져 왜구의 침입에 무방비가 된다는 점,
넷째, 장마철이라 비가 많이 내려 압록강 도하가 어렵고 활의 아교가 풀어져 무기가 제 힘을 못 쓰며 전염병이 돌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함께 내세웠습니다.
2) 4불가론의 의미
4불가론은 표면적으로는 군사·외교·농사·민생을 모두 고려한 합리적인 반대 논리였고, 실제로 당시 고려의 국력과 상황을 생각하면 요동 원정은 매우 무리한 계획이었습니다.
동시에 이런 논리는 명나라와의 직접 충돌을 피하고 향후 친명 세력을 중심으로 새 질서를 만들려 했던 이성계·신진사대부 그룹의 정치적 계산이 담긴 명분이기도 하여, 후대에는 “원정 반대와 정권 장악을 위한 명분이 함께 섞여 있었다”는 해석도 제기됩니다.
위화도 회군의 전개와 결과
1) 위화도에서의 회군 결정
1388년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요동정벌군은 압록강 하류의 섬인 위화도까지 진군했으나 장마로 강물이 불어나 도하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이성계는 다시 한 번 출병 취소를 건의하였습니다.
우왕과 최영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향하는 결정을 내렸는데 이것이 바로 위화도 회군으로 형식상 왕명을 거역한 군사 쿠데타에 해당합니다.
2) 정권 장악과 조선 건국으로 이어짐
회군군은 빠르게 개경을 장악하고 최영을 제거한 뒤 우왕과 창왕을 차례로 폐위시키며 실질적인 정권을 장악하였고 이 과정에서 신진사대부와 손잡은 이성계 세력이 고려 말 정치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이후 공양왕을 내세운 뒤 점차 권력을 정리하고 결국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면서 위화도 회군은 “고려 왕조의 종말과 조선 왕조의 시작을 연 결정적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이성계 VS 최영
이성계가 최영을 제거한 사건은 위화도 회군 직후 벌어진 고려 말 정치적 격변의 핵심입니다.
최영은 요동정벌의 주도자이자 우왕의 신임 장군으로, 이성계가 회군해 개경으로 돌아오자 최영 세력은 반격을 준비했으나, 이성계는 이를 먼저 제압하고 최영을 유배·처형하는 과정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위화도 회군 직후 최영의 상황
1) 최영의 반격 준비와 이성계의 빠른 대응
1388년 음력 5월 25일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 군대는 9일 만에 개경에 도착하였고, 최영은 이를 듣고 급히 군대를 모아 궁궐 방어를 준비하였습니다.
하지만 고려 주력군 대부분이 이성계 쪽으로 돌아서거나 중립을 지키는 상황에서 최영의 병력은 소수에 불과해 전력이 열세였고, 결국 이성계 군대가 궁궐을 점령하면서 최영은 사로잡혔습니다.
2) 최영에 대한 ‘간신’ 낙인
이성계는 회군 명분으로 “최영이 왕을 속이고 무리한 요동정벌을 주도한 간신”이라는 주장을 내세웠으며, 이는 요동정벌 반대(4불가론)를 펼쳤던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최영을 제거할 정치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회군 성공 후 이성계는 최영을 고봉현(현재 고양시 일대)으로 유배 보내고, 이후 합포(충청남도)와 충주로 옮겨 감시하였습니다.
최영의 최종 처형 과정
1) 개경 압송과 순군옥 수감
유배된 지 약 6개월 후인 1388년 12월, 창왕이 즉위하자 최영은 공료죄(요동 공격 죄)로 개경으로 압송되어 순군옥(巡軍獄)에 갇혔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 세력은 최영을 요동정벌의 책임자로 몰아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 명분을 만들었고, 정몽주 등 일부 신하들이 최영 처형을 적극 주도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2) 참수형 집행
결국 최영은 1388년 12월 개경에서 참수형에 처해졌으며, 당시 73세의 고령이었습니다.
처형 당시 최영은 담담한 모습을 보였고, “나에게 탐욕이 있었다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없었다면 자라지 않을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의 무덤에는 풀이 자라지 않아 ‘적분(赤墳)’으로 불렸습니다.
시민들은 시장 문을 닫고 눈물을 흘리며 애도하였고, 도당에서 쌀·콩·베 등을 부의하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이성계의 제거 방법 분석
1) 군사적·정치적 공세 병행
이성계는 최영 제거를 위해 군사적 우위를 먼저 확보한 뒤, 정치적 명분(간신 처단, 요동정벌 책임 전가)을 만들어 유배와 처형을 순차적으로 진행하였습니다.
직접 칼을 댄 것이 아니라, 회군 과정에서 최영을 사로잡고 유배한 뒤 조정 세력을 동원해 최종 처형을 유도하는 간접적 방법을 택하였으며, 이는 이성계의 정치적 숙련성을 보여줍니다.
2) 최영과의 관계 변화
원래 최영과 이성계는 동료 무장으로, 최영은 이성계를 후배로 아꼈으나 요동정벌 반대(4불가론) 이후 관계가 틀어졌고, 회군으로 최영의 실질적 후계자였던 이성계가 배신자로 돌변하였습니다.
이성계는 최영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잘 가십시오”라고 인사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는 기록도 있으며, 이는 개인적 우정과 정치적 필요 사이의 갈등을 시사합니다.
최영 제거의 역사적 의미와 평가
1) 고려 말 권력 교체의 상징
최영 제거는 위화도 회군의 성공을 완성하고, 이성계가 고려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는 결정적 사건으로, 이후 우왕·창왕 폐위, 공양왕 세우기,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최영은 권문세족과 무신 세력의 상징이었고, 그의 제거로 신진사대부 중심의 새 세력이 부상할 길이 열렸습니다.
2) 최영에 대한 후대 평가
최영은 충직한 무장으로 평가되며, 처형 당시의 당당함과 백성들의 애도가 전해지며 ‘진짜 충신’ 이미지로 남았습니다.
반면 이성계는 실리적 선택으로 보아지나, 당시 고려 국력으로는 요동정벌이 무리였다는 점에서 최영 제거를 정당화하는 시각도 있으며, 두 사람의 관계는 고려 말 무신정치의 비극적 결말로 여겨집니다.
요동정벌과 위화도 회군을 보는 여러 시각
1) ‘정당한 전쟁 회피’인가, ‘기회주의적 쿠데타’인가
전통적인 서술에서는 이성계의 4불가론을 “나라 형편과 백성의 삶을 생각한 현실적 판단”으로 높게 평가하며 무리한 전쟁을 막고 새 왕조의 토대를 닦았다고 보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반면 일부 연구와 칼럼에서는 이성계가 이미 명과의 관계 개선 신진사대부와의 권력 연합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며 요동정벌 반대와 회군이 결과적으로 본인의 정권 장악에 유리한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정치적 계산이 크게 작용한 쿠데타”로 보아야 한다는 시각도 제기됩니다.
2) 요동정벌 자체의 가능성에 대한 평가
당시 고려는 왜구의 잦은 침입 권문세족의 토지 장악 재정 악화로 국력이 크게 약해져 있었고 명나라는 새로 들어선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였기 때문에 요동정벌이 실제로 성공하기는 매우 어려웠다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또한 장마철 농번기 남해안 방어 공백 전염병 위험 등 4불가론에서 언급된 요소들은 실제 전쟁 수행에 큰 부담이 될 수 있는 요소였으므로 단지 핑계만은 아니었습니다.